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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및 고려초 불교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전래와 형성

황와 2019. 9. 6. 13:47

선종(禪宗)의 전래와 9산선문(九山禪門)의 형성

                                                                                                                                                                                                                                                                                                                            

한반도에 선(禪)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이다.

도의와 홍척이 당에 가서 마조 도일 문하인 서당 지장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각각 821년과 826년에 귀국한 이후부터 신라에서 선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당에서 조사선을 전해 받은 유학승들이 계속 귀국하면서 9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했다.

9산선문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의 아홉 파(派)를 말한다. 


9산선문 계보도

              구산선문 계보도













                                                              
                                              


9산선문 위치도
                                                                                [불교 구산선문 위치도]                

1.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는 784년에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전해 받았다.

당에 머물기를 37년, 821년에 귀국하여 조사선을 전했으나

당시 불교계는 유식과 화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그의 선법을 염거에게 전했고,

염거는 체징(體澄, 804~880)에게 전했다.

체징은 837년에 당에 가서 여러 선사들을 찾아뵙고 840년에 귀국했다.

그는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선풍(禪風)을 일으켰는데,

이 일파를 가지산문이라 한다.


가지산 보림사 일주문
                                                                                    가지산 보림사 일주문                

2. 실상산문 (實相山門)                    

 홍척도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전해 받고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고 실상산문(實相山門)을 형성했다.

 도의보다 귀국은 늦었지만 산문을 형성한 것은 최초였다.

 수철(秀澈, 816~893)은 실상산문 제2조이다.

 경문왕(861~875)은 그에게 교(敎)와 선(禪)의 같고 다른 점을 물었고,

 헌강왕(875~886)의 청에 따라 남원 심원산사(深源山寺)에 머물렀다.


국립중앙박물관 염거화상탑      장흥 보림사 체징 보조선사탑     

                                                       국립중앙박물관  염거화상탑                                       장흥 보림사 체징 보조선사탑                            

지리산 실상사 홍척 증각대사탑     지리산 실상사 수철화상 승탑

                                                      지리산 실상사 홍척 증각대사탑                               지리산 실상사 수철화상 승탑




3. 동리산문(桐裏山門)            

혜철(惠哲·慧徹, 785~861)은 814년에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전해 받고,

839년에 귀국하여 곡성 동리산에 태안사(泰安寺)를 창건하고 동리산문(桐裏山門)을 형성했다.

이 산문에 여(如, ?~?)와 윤다(允多, 864~945), 도선(道詵, 827~898)과 경보(慶甫, 868~945)가 있다.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20세에 곡성 동리산 혜철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도선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정통했고,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35년 동안 머무니 학인이 운집했다고 한다.

경보는 892년에 당에 가서 동산 양개의 문하인 소산 광인(疎山匡仁)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1년에 귀국했다.

후백제 견훤의 청에 따라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다가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렀고,

고려의 태조 · 혜종 · 정종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곡성 태안사 혜철 적인선사탑     곡성 태안사 윤다 광자대사탑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곡성 태안사 혜철 적인선사탑                    곡성 태안사 윤다 광자대사탑     

  4. 희양산문 (曦陽山門)             

이 산문의 개산조(開山祖)는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이다.

그의 법맥은 중국 선종 4조 도신→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으로,

도신 문하에서 갈라져 나온 계통이다.

도헌에서 양부(楊孚, ?~917)→긍양(兢讓, 878~956)으로 이어지는데,

긍양은 899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石頭希遷) 문하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여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을 형성했다.

현재 문경 봉암사에 있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은

선의 전래와 9산선문 형성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므로 발췌해 옮긴다.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도의가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이어받고 돌아와 처음으로 그 법을 전하여,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던 교종의 단점을 감싸주려 했으나

그들은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새가 남쪽으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했다.

경전의 독송에만 젖어 있던 그들은 선법을 마귀의 말이라 했다.

이에 도의는 아직 선법의 때가 아니라 여기고 설악산 북쪽에 은둔했다.

그러나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자들이 산에 가득했고,

매가 비둘기로 변하듯 교화를 받은 자들이 깊은 골짜기에서 나오니,

도(道)는 인력으로 폐할 수 없을 때가 돼야 이루어지는 법이다.

흥덕왕(826~836)이 즉위하여 그릇됨을 제거하니 나라가 평안하고 융성했다.

이즈음 홍척대사가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이어받고 돌아와 지리산에 머무니,

왕은 법문을 청했고 궁궐에서는 그가 온 것을 경하했다.

선법을 보여서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게 했으니,

그의 선법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는 것이었다.

고요할 때는 산과 같았고, 움직일 때는 깊은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았다.

당으로 가서 죽은 승려도 많았고,

신라로 돌아온 이로는 도의와 홍척, 태안사의 혜철국사, 혜목산의 현욱(玄昱, 787~868),

쌍계사의 혜조(慧照), 신흥사의 중언(仲彦), 진구사의 각휴(覺休), 쌍봉사의 혜운(慧雲),

굴산사의 범일(梵日, 810~889), 성주사의 무염화상(無染和尙, 800~888)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선사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었고,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말에 ‘이름을 감추려 해도 이름이 따라오고, 명성을 피하려 해도 명성이 따른 분들’이었다.

그리하여 그 가르침은 중생 세계를 덮었고 자취는 비석에 새겨졌다.

별도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들창을 내다보지 않고도(당에 가지 않고도) 대도(大道)를 보았고,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보배를 얻었으며,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른 분이 계셨으니, 바로 지증대사이다.

대사는 범체(梵體)에게 출가했고, 경의(瓊儀)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혜은의 선법을 이어받아 양부에게 전했다.

법계(法系)로는 당의 4조 도신이 5세(世) 부모가 되니,

해동으로 내려온 것을 보면,

도신의 제자는 법랑이요,

손(孫)은 신행이며, 증손(曾孫)은 준범, 현손(玄孫)은 혜은, 말손(末孫)이 지증대사이다.

               

희양산 봉암사 긍양 정진대사탑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희양산 봉암사 긍양 정진대사탑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5. 봉림산문(鳳林山門)            

이 산문의 개산조 현욱은 824년에 당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의 선법을 전해 받고

837년에 귀국하여 지리산 실상사에 머물다가 경문왕(861~875)의 청으로 여주 혜목산(우두산) 고달사(高達寺)에 머물렀다.

그의 선법을 이어받은 심희(審希, 855~923)는 창원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봉림산문(鳳林山門)을 형성했다.

그의 제자 찬유(瓚幽, 869~958)는 892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 문하인 투자대동(投子大同)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1년에 귀국하여 혜목산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심희 진경대사탑     여주 고달사지 찬유 원종대사탑

                                                    국립중앙박물관 심희 진경대사탑                             여주 고달사지 찬유 원종대사탑

               

6.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은 821년에 당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마곡 보철(麻谷寶徹)의 선법을 전해 받고

845년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산 성주사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을 형성했다.

현휘(玄暉, 879~941)는 무염의 제자 심광(深光, ?~?)에게 출가하고,

906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 문하인 구봉 도건(九峰道虔)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니, 태조가 그를 국사에 봉하고 충주 정토사에 머물게 했다.


7.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은 831년에 당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염관 제안(鹽官齊安)의 선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강릉 사굴산에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하고

4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사굴산문(闍崛山門)을 형성했다.

그의 제자 행적(行寂, 832~916)은 870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 문하인 석상 경저(石霜慶諸)의 선법을 전해 받고 885년에 귀국했다.


8. 사자산문

도윤(道允, 798~868)은 825년에 당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남전 보원의 선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그의 법을 절중(折中, 826~900)에게 전했다.

절중은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지금의 법흥사)에 머물면서 사자산문(師子山門)을 형성했다.


9. 수미산문

이엄(利嚴, 870~936)은 896년에 당에 가서 동산 양개의 제자인 운거 도응의 선법을 전해 받고

911년에 귀국하여 해주 수미산 광조사(廣照寺)에서 선풍을 일으켜 수미산문(須彌山門)을 형성했다.


                                                                             보령 성주사 5층탑


 이 9산선문은 한반도 선종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에서 스승의 법을 이어받지 않고 당에 가서 선법을 전해 받은 선사만을 개산조로 한다는 점이다.

 그 외에는 새로운 선법을 전해왔어도 개산조로 하지 않고 그 스승의 산문에 소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엄을 수미산문의 개산조로 한 것은 그가 조동종을 전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국내에서 어떤 스승의 선법도 전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조동종을 전해왔어도 국내에 스승이 있을 경우에는 그 스승의 산문에 소속되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스승의 법을 이어받은 후,

당에 가서 스승과 다른 문하의 선법을 전해 받았어도 귀국해서는 스승 밑에 소속되었다.

같은 산문에서 스승은 마조의 문하인데, 제자는 석두의 문하인 것은 그 때문이다.

 9산선문의 이러한 전통은 중국 선종이 어떤 선법을 전해 받았는가를 중요시한 데 반해,

 한반도의 선종은 가풍, 즉 인적인 관계를 중요시한 독특한 특징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조 문하와 석두 문하가 혼합된 9산선문 전체를 일컬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 두 계통의 근원이 되는 조계 혜능(曹溪慧能)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계종’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한반도의 선종이 중국의 5가 7종과 같이 종파로 분열되는 것을 막아주어,

오늘에 이르도록 조계종 일파로 이어져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