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지(密州誌)에 실린 계은(溪隱)공 이신(李申) 선조 기록
이신은 지평 관리였는데 인품이 강직하고 충효로와 어릴적부터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산에서 곰 괴물 본 것처럼 재빨리 도와 옳은 이유를 깨뜨리고 요사스런 기운을 느끼지 않고 강을 건너 왼쪽으로 갔다.
<이는 속칭 하늘왕 신이 강 오른쪽에서 모든 백성들을 미혹한 일이 있음과 같다.>
공양왕 4년 간관 김진양 등과 더불어 상소를 하여 극적 논란을 일으켰는데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상소문에 올려 밝은 내일을 갖지못할 것이라고 하고 합문에 엎드려 청하기를 조준 등을 먼 곳으로 유배하고 또 사헌부 정희등과 글로서 교류하면서 조준 등을 주살하고 오사충을 탄핵하여 왕명으로 먼저 남은 등을 국문하고 자기는 정몽주를 만난 피해를 알고 정희등과 더불어 먼 곳으로 숨어버렸다.
<이 출처는 동사를 모아서 요약함>[ 密州誌 乾 3券 2페이지 게재]
[원문]
李申官持平爲人剛直忠孝少時路逢熊山恠物輒扶曳撞破之由是妖氣不敢渡江而左俗稱天王神江右諸民滔惑事
이신관지평위인강직충효소시로봉웅산괴물첩부예동파지유시요기불감도강이좌속칭천왕신강우제민도혹사
之恭讓王四年與諫官金震陽等上疏極論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等疏上畱中不下明日伏閤雯請遂流浚
지공양왕4년여간관김진양등상소극론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등소상유중불하명일복합문청수유준
等于遠地又與憲府鄭熙等交章請誅浚等並劾吳思忠王命先鞠誾等己而鄭夢周遇害與鄭熙等並竄遠地 出東史纂要
등우원지우여헌부정희등교장청주준등병핵오사충왕명선국은등기이정몽주우해여정희등병찬원지 출동사찬요
[주석]
恠 : 괴이할 괴,괴상할 괴 輒 : 문득 첩,
滔 : 물넘칠 도, 誾 : 온화할 은.
畱 : 머무를 유, 雯 : 구름무늬 문
竄 : 숨을 찬, 달아날 찬
[관련유적]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효자마을 효자정려비(경남지방문화재 제281호)와
선생의 분묘(조선초 사각(四角) 적석(積石) 분묘)와 자연석에 새긴 묘표에 '도만호(都萬戶) 이신지묘(李申之墓)’라고 기록됨
[밀양의 효자마을 소개]
부산 밀양 간 국도를 따라 진영읍을 거쳐 낙동강 하류의 수산대교를 건너서면 밀양시 하남읍이고,
그곳에서 하남평야를 거쳐 밀양쪽으로 4km지점에 남전리 효자마을이 있다. 그 입구 마을을 은산이라고 한다.
밀양의 명산인 덕대산(德大山)이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며,
그 한 준령이 동남쪽으로 뻗어서 재령등(載寧嶝)이라고 부른다.
그 재령등 기슭에 효자 정려비(旌閭碑)가 우뚝 서 있어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끌게 하고 있다.
이 비는 고려 공양왕조의 충절신이고, 밀양 오현의 수반(首班)으로서 충효(忠孝)가 겸전(兼全)하여,
고장(故庄)의 백세지사표(百歲之師表)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효자(孝子) 지평(持平) 이신(李申)선생의 효제(孝悌)를 기리기 위해
조선 태종왕(1405년)의 명정(銘旌)으로 세운 효자정려비이며, 아들 의동(義仝)을 녹용(錄用)하고 마을을 효자동으로 명명하여 부르게 한 것이 효자마을의 유래이다.
선생의 효행 행적은 국가 편찬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조선 성종17년, 1481년)과 동국속삼강행실(東國續三綱行實 조선 광해군 10년 1618년)등에 등재되어 있다. 특히 광해군 때에 편찬하여 오대산 사고에 내사(內賜)하고 있는 신속삼강행실(권2, 장29) 효자조에는 이신(李申)부토 (負土)라 명제(命題)하여 그 효행을 전면에 판화(版畵)를 그려두고 있다. 그리고 당시(383년전) 한글로 "사헌부 지평으로서 부모상을 당함에 스스로 부토영분(負土營墳)하고 밤낮으로 애통해 마지않고 상을 마칠 때까지 상복을 풀지 않았으며, 죽과 채소만 먹으니 향리의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또한 초장 장사에 드는 비용마저도 여러 형제들에게 번거로이하지 않고 혼자 도맡아 부담했으며, 여묘(廬墓)를 삼년동안 하니 몸이 매우 수척해 졌다. 이와 같이 효성이 지극하니 나라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효자 이신(李申)선생의 자(字)는 신지(伸之)이며 호(號)는 계은(溪隱)이고 재령인(載寧人)이며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이다. 공민왕 때에 효렴(孝廉)으로 뽑혀 순군부(巡軍府)의 도만호(都萬戶)로 봉직하다가 그 조정이 쇠퇴하므로 부모 일선(日善)을 따라 일가족이 동반남하(同伴南下)하여, 밀양부의 서쪽 조음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공양왕 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으로 다시 봉직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천품이 굳세고 정직하며 의리에 밝았으며, 평소에 근신독행(勤愼篤行)하여 집에서는 효도하고 벼슬함에 충성을 다했다.
1389년같은 친명파(親明派)이던 정몽주 선생과 이성계는 폐가입전(廢假立眞 : 가짜는 버리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를 내세워
창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몰아 축출하고 고려 34대 공양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분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이어 대립하게 됐다. 문인 정몽주 선생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사회개혁을 하여, 발전을 이루는 것이 순리이며 신하의 도리임을 강조했고, 무인인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감행하여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왕조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선생은 고문의 장독(장독)으로 유배 도중에 순절(殉節)했다. 이리하여 지평 이신은 포은 정몽주 선생과 초려(草廬) 김진양 선생 등 양 선생과 더불어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고려왕조를 휘호하다가 순절한 만고의 강상(綱常)을 세워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충신이었으나 고려 왕조가 붕괴되니 따라서 운명을 같이하여 통한의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그 후 태종은 유교 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타살한 정적 정포은의 유교적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측근과 이신(李申)선생을 비롯한 고려 충의제현(忠義諸賢) 56명을 일괄 사면(1405년)하였고 그분들의 충절이 조선 왕조의 신하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게 했다.
이때 이신(李申)선생은 다만 효제(孝悌)만을 가상(嘉尙)하여 효자 정려하였으니 참으로 유감되고 한탄스럽다.
이외에도 선생의 충절행적(忠節行蹟)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정사(正史)와 읍지, 문집 등 많은 문헌에 그 사적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를 경상남도 문화재(제281호)로 지정하면서, 선생의 "신사군이충(臣事君以忠-신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야한다.)정신과 효자백행지원 충신구어효자지문(孝子百行之源 忠臣求於孝子之門 - 효는 백행의 근본이요,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한다.)라는 교훈을 수범한 숭고한 충효정신을 귀감으로 삼아 후세의 충효사상 계승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미래의 조국에 주인공이 될 자랑스러운 아들딸을 둔 분들이여!
효와 충은 표리일체(表裏一體)로 보면 되고 그래서 가정에서 훌륭한 효자는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충신이었음을 효자 이신 선생의 행적에서 살펴볼 수 있고, 그 외에도 고금의 역사 속에서 수 없이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 선현께서는 충(忠), 효(孝), 열(烈)을 숭상했고, 이를 가장 중요한 인간의 덕행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우리 모두는 선조는 충효사상을 오늘에 계승하고, 이 귀감을 영원히 존경하고 본받아서 조국에 이바지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이 양파간에는 현격(懸隔)한 이념의 대립으로 갈등이 심오(深奧)한 경지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는 결국 정몽주 선생을 개성 선죽교에서 타살(1392년 4월 4일)하고는 공양왕을 축출 유배했다.
그리고 보수온건파의 정몽주의 측근인 이 선생을 비롯한 56명을 결당모란죄(結黨謀亂罪)로 몰아 순군옥에 수감하고는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새왕으로 이성계(太祖)를 옹립하여 1392년 7월 28일 조선 왕조를 개국했다.
이때 이태조의 즉위교서(卽位敎書)에는 순군옥에 수감되어 있는 정적 56명을 일괄처벌한 조항이 있는데,
그 속에 지평 이신(李申)을 비롯하여 최을로, 이작 등 26명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70대를 집행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