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은 山이고 싶어 한다.
山은 山이고 싶을 뿐이다.
山은 산으로 남기를 바란다.
山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山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산은 인간이 산에 들어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산에 인간이 들어와 같이 살기를 바란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산의 질서를 지키며 살기를 바란다.
산의 질서, 오랜 시일에 걸쳐 자연이 만든 질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산의 질서를 함부로 파괴하지 말라는 소리다.
山의 붕괴, 山의 저주, 山의 재앙은
山에 들어와 살려는 인간은 山을 인간의 요구대로 요리하려고만 하지 말고
山의 생리에 순응하며 살라는 山이 인간에게 외치는 통보다.
山이 山이기를 바라면서 인간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경고다.
山은 비가 오면 자연히 만들어진 물길로 물을 흘러내려 보내고 싶어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물길을 없애거나, 막거나, 물이 흘러내리는 방향을 바꿔놓지 않기를 바란다.
같이 사는 다른 동물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 짓이다.
산이 바라는 데로 순응하며 산을 빌려 같이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인간만이 산이 누려온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니까 산이 화를 내는 것이다.
산은 없어진 물길을 따라 물을 흘러내려 보내고 싶고, 막힌 곳은 뚫고 나가고 싶고,, 돌려 놓은 물길은
원상으로 돌려 놓고 싶어한다.
그것이 산의 벌이는 자연질서 회복의 활동이다.
이 산의 자연질서 회복 운동을 인간이 자기들 관점에서 토사가 흘러 내렸다고도, 산 사태가 났다고도,
산이 무너져 내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산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휘저어 놓은 산의 질서를 원상으로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간이 산과 더불어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산을 인간의 눈이 아니라 산의 눈으로 바라보기 바란다.
산의 저주를 피하는 방법은 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길뿐이다.
산의 질서를 거역하면 산이 주는 재앙은 항상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50년 만에 처음, 100년 만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자기 위안을 삼아보아도 자연의 질서에 反했기에
자연이 내린 재앙에 당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산의 질서를 지키자. 산의 질서에 순응하자
그것이 원래 산의 것을 산에 돌려주는 일이다.
산이 주는 저주, 산이 내리는 재앙은 인간이 산에 퍼부은 교만의 반대 급부다.
부득이 산의 질서에 손을 대어야 한다면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그 최소한의 손질에도 산이 화를 내었을 때 내릴 재앙에 최대한으로 대비해야 한다.
최소한의 변화, 최대한의 대비, 그것이 인간이 산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최선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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