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사기(景德祠記)
景德祠記
고려 순성보조공신 문하시중 이공 휘(諱) 우칭(禹偁))은 본래 월성 대성(月城 大姓)에서
재령군(載寧君)으로 수봉(受封)된 까닭에 추대(推戴)되어 높이 숭상하니
월성에서 분봉(分封)된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공의 선세대(先世代)에는 신라(新羅) 급량부대인(及梁部大人) 휘(諱) 알평(謁平),
소판(蘇判)이신 휘(諱) 거명(居明),
중원태수(中原太守)이신 휘(諱) 금서(金書),
사간(司諫)이신 휘(諱) 주복(周復)과 같은 명경(名卿)이 있었다.
후손이 번연(繁衍)하여 온 나라 각 지방에 파(派)가 널리 분포되어서
드러난 관직과 홍유(鴻儒) 문장(文章)과 절의(節義)와 행의(行義)가 면면히 이어서 끊어지지 않고
손가락을 구부려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되었다.
이제 대동화수회(大同花樹會 공의(公議)로서 분발하여 밀양시청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오리(五里)의 조음동(召音洞)에
하나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현판을 경덕사(景德祠)라 하고 공의 위패를 모시고는
정결(淨潔)한 제수(祭需)를 올려 제사지내며 길이 효사(孝思)를 잊지 않는 정성을 펴고
겸하여 숭조돈종(崇祖敦宗)의 예(禮)를 닦고
다만 이땅의 깊숙한 숲속의 정대(亭臺)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을 밝혔을 뿐아니라
실로 공의 후손인 사재령(司宰令) 휘(諱) 일선(日善)공이 창업(創業)한 곳이 되어서
여러 세대의 묘소에 심은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완연(宛然)하여
푸른나무가 고목이 되었고 한떨기의 꽃 한 조각의 돌이 곳곳에 남아 향기가 아직도 소헐(小歇)되지 않았다.
사우(祠宇)가 장차 낙성되어(落成)되니
벗 이병업(李秉業) 군의 소개로 그 문중 어른 수인(數人)이 공의 사적(事蹟)과
자못 창사(創祠)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갖추어 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어 간략하게 서술하여 어진 후손들의 간절한 정성에 보답하는 바이다.
정묘(丁卯 1987년) 가배후(嘉俳後) 정일(丁日)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짓다.